이번 [일요일의 나]는 누아 이야기의 총집본으로 보내드립니다. 누아 이야기는 제가 무려 2018년, 지금부터 5년 전부터 시리즈 형태로 계속 써오던 글입니다. 5년간 써온 이야기라 초반 글은 2018년, 마지막은 2022년이니 제 필체의 변화도 느끼실 수 있을 거 같네요 하하.
저는 누군가를 좋아하면 오래 가는 성격입니다. 제가 끝내지 않은 사랑이면 더더욱 그래요. 상대는 종지부를 찍었는데, 저는 마음이 남아있는 거죠. 하지만, 그 사람은 제 곁에 남아있지 않기에 그 사랑, 그 대상은 사실 그때의 그 아닐까요. 저는 이 남아있는 과거의 허상을 Noir (프랑스어로 검정)이라고 생각했어요. 누아는 그 사람이자, 그 사람이 남긴 흔적, 그를 그리는 나의 감각, 그이자 그가 아닌 존재입니다. 그 사람을 그릴 때, 생각나는 색이 검정색이기도 하고, 그의 빈 공간이 검정색으로 느껴지기도 했고, 그의 그림자같은 허상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죠. 기억 속의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모서리가 풍화되면서 뭉툭해져가고, 점점 그에 대한 형상은 마모되어 검은 뭉텅이처럼 되어가고 있는 듯합니다.
저는 어찌 보면 그 사람을 지금도 사랑하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의 그 사람이 아닌 그 시절 그 때의 그 사람을요. 하지만, 사랑했던 이를 떠나보낸 것처럼 갈수록 옅어져갑니다. 처음엔 온전하다가도 점차 멀어져가고 흩어져가는 마음을 놓지 못하고 지낸지 햇수로 5년째네요. 그래서 이제는 어차피 잡지 못할 그 마음을 놓아주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 누아 이야기를 쓰며 카페에서 눈물 흘리던 저는 이제 완전히 누아를 놓아줄 수 있을까요? 여러분에게도 여러분들을 아프게 하고, 이제는 볼 수도 없지만,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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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아 이야기 1
당신의 색은 검정
검정, 누아
누아 당신 생각하며 누아 춤을
누아 당신 노래하며 누아 꿈을
지나가는 행인의 눈에 누아
그가 입은 겉옷에 누아
그가 물고 있는 담배 연기 속에 누아
당신을 몹시 닮은 검정 누아
조금 더 옅은 누아, 그런 대로의 누아
누아 다시 또 누아
누아누아 지워진 검정 누아
당신은 누아, 또다시 도망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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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아 이야기 2
도망치는 당신을 생각해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없어질 때도 있다가 빛이 들어나는 순간 민낯이 두려워 다시 도망치던 모습
사라질 때 사라지더라도 눈부신 햇빛을 바라보고 사라져야지
없어지더라도 한 번은 눈을 찌푸려봐야지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곳은 바다야 깊숙이 가라앉아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물과 바다와 너와 나, 누아
우리가 있는 곳의 물은 내 어깨를 스쳤다가 당신의 다리를 스쳤다가 어디를 어디를 지나다가 어디로 사라지고
당신은 매순간 새로운 물을 느끼다가 언젠가는 나와 닿고 닿기 무섭게 멀어지고 당신도 흘러가고
헤엄치는 것이 빠를까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빠를까 누아가 내 몸에 닿기까지
누아가 지나가면 당신이 올 거야 당신보다 빠르거나 늦거나 누아도 스쳐가 누아 그림자 같은 누아
어느 샌가 당신보다 더 기다리고 있는 누아
사라지던 스치던 살아있던 모두 잊어버리고
있는 그대로 누아 춤을
헤엄치는 게 아니라 허우적대는 모습이더라도
영원히 남아 있어줘
파멸하는 나의 불꽃, 누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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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아 이야기 3
누아 너는 사라졌다가
내가 기억하지 못할 때에 다시 나타나
나를 힘들게 하다가
이제는 더 불안해도 아프지 않을까 하다가
누아 바라보고 다시 두려워지는
내 삶의 가장 가는 낭만, 누아
누아, 너는 나를 죽이려는 걸까
그 이상은 무섭고 그냥 서로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더 무섭고 두려워지고 숨어버리고
네가 나의 어둠이었다면
나도 너의 어둠일 거야
괜한 희망에 안심했다가
다 거짓말이었던 것이었어
지금이라도 도망가면 안전할 거야
누아가 묶은 발은 쉬이 떨어지지 않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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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아 이야기 4
누아는 끊임없이 퍼져가
내가 보이지 않는 모퉁이까지 산재해있고
가라, 씹을수록 더 질겨지는 그림자
나의 누아는 단순히 존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야
더 검게 물들어 갈수록
더 짙게 흔들리는 암흑
살아있는 모든 것을 좀먹어가면서
나를 노리고 다가오는 누아
사랑했던 것뿐인데
너는 나를 없애버리고 싶은 거니
마음을 준 것뿐인데
주고 싶어서 준 것도 아닌데
누아는 나를 탓하고 있어
오해 속에 얽혀 나만 묶여있는
(사람들은 저 검은색이 보이지 않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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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아 이야기 5
누아, 흩어져 더는 날 찾지 않아
그동안 찾아왔던 것은
아무것도 아닌 무의미의 연속
내뱉는 것에 없고
들이쉬는 것에 없는
사라진 존재, 검은색 누아.
그러다가도 한 번씩은 네가 그리워
불러도 오지 않는 누아
영원히 오지 않을 누아
이제는 볼 수 없겠지
떠나간 누아가 남기고 간
흐릿함
강렬함
아련함
가끔은 너를 착각하게 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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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아 이야기 6
너와 나의 꿈을
잊게 하네
가련히 서있던 너는
누아만을 남겨놓고 떠났네
나는 누아를 놓지 못하고
누아의 냉랭함을 나눠 안고 있었네
끌어안고도 차가울 수가 있을까
너의 흔적 누아는 늘 싸늘했어
누아는 어느 날 훌쩍 떠나
몇 달을 오지 않다가
갑자기 찾아오고 나를 흔들어 놓고
다시 날래게 떠나는 누아
다음에 또 올 거지?
힘들지만 바라고 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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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아 이야기 7
누아 우리의 예전을 기억하니
우리는 붉은색
그리고 푸르기도 해서
나는 지금도 보라색을 좋아하고 있어
며칠 전 낮에는
너를 닮은 아이를 봤어
너는 아니었지만
분명히 너를 빼닮았어
너의 잔상은 점점 흐려가
나는 그것들을 끌어안고
꿰뚫는 가시들에 피흘리고 있어
우리가 다음 주에 아니 그 다음 주에
아니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마주한다면
나는 종종 바라왔지만
그토록 얼굴이 달아오르는 일은 없을거야
누아 우리의 예전을 기억하니
우리는 붉은 색
그리고 푸르기도 해서
나는 아직도 보라색에 아파하고 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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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아 이야기 8
주말은 주간이 있어 생겨났듯
누아도 네가 있어 태어났어
입 속을 깨물어 묘한 철의 맛이 느껴질 때
상처를 내고 떠난 네가 떠올라, 누아
네가 날 할퀴고 떠난 것도 수백 아니 수만 번의 순간들
너와 나의 만남들은 늘 처음 같아서
낯설고 생경하게 부어오르는 상처자국
어젯밤 꿈에는 누아가 아닌 네가 나왔어
너는, 너는, 낯설고 생경하고,
그리웠고,
그리움.
자고 깨어나면 잊힐 너이지만,
나를 맴도는 그 그리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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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아 이야기 9
누아는 네가 남기고 간 많은 아이들
나는 작은 누아 한 조각으로도 잉태할 수 있어
너의 조각들을 끌어모아 글 한 줄을 남기네
누아의 태초는 너의 그림자
너를 좇지 못하고 너의 흔적만을 좇다가
네가 남은 그 작은 조각들을 끌어모아 위로받고 있었어
누아는 흘러도 가고 날아도 가는데
내 곁엔 쉬이 오지 않네
나만을 피해가네
동시에 나를 파괴하러 찾아온 죽음의 누아
누아는 사나울 때만 나를 괴롭혀
발톱을 드러낸 누아는 나를 곧잘 할퀴네
나는 나를 끌어안고 몸을 굽히네
누아는 제멋대로야
내가 원할 때는 오지 않다가
괜찮을 즈음 드리워 나를 흔들어 놓네
흔들리네
언젠가는 흔들리지 않을까
너는 내게 줄곧 상처지만
사랑하기에 상처인 개구쟁이 누아
흔들렸으면 하네, 끊임없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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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아 이야기 10 (完)
누아는 다섯 번째 가을에도 날 찾아와
존재는 끊임없이 희미해지고
내가 너를, 누아를 사랑했었지
누아도 살아있었나봐
어린 시절엔 그렇게 날카로운 발톱이 있었는데
이제는 죽어가네, 그저 나약하네
예전엔 분명히 너무 선명히 나를 괴롭혔는데
이젠 네가 흐려져서
흐려진 것에 마음이 시리네
누아를 거의 다 떠나보냈나봐
이젠 누아는 나를 피 흘리게 하지 못해
연약해진 너를 끌어안고 마지막 밤을 보내네
우리의 이별을 준비하네
네가 떠난 지는 한참 전이지만
이제 이별을 맞이하네
나지막한 안녕에 그 시절들이 떠올라
울컥하는 사랑, 아니면 연민인가
미련인가, 흔적인가
잘 가, 잘 자
마지막 인사를 고민하다가
고마웠어
너를 사랑했던 내가 하는 마지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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